이런거 보면... 영국이 약소국 괴롭힌 것을 제외하고 비슷한 전력의 국가랑 싸워서 이긴적이 있나 ㅡ_ㅡ?
전략적으로 자신이 강할때 약한 곳을 치는 것이 옳은 것이기는 하고 비난받을 것도 아니지만 참.... 영국군도 보면 뻘짓 많이 하는 것 같다. 압도적인 전력과 물자로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하질 않나.... 2차 대전 후반까지 독일이 러시아 침공하기전까지는 그냥 두들겨 맞고 고립되어버리질 않나... 그렇다고 100년전쟁은 딱히 성과가 있나.... 개척정신이나 독창성 같은게 좋아서 어디 돌아다니다 소수민족 이나 발달이 늦은 민족 노예화 시키는건 천재적인 것 같다. 부려먹을 민족이 없으니 요즘은 영국도 그다지 대단한 국가로 안보이네 사실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기분이지 소로스 한명한테 국가가 농락당하고 미국의 개라는 소리나 듣고 있으니 하여튼 영국도 보면 재밌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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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발발할때만 해도 터키는 엄연히 중립국이었지만, 내적으론 독일군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전통적인 적성국인 러시아가 독일과 대적하게 되자 터키는 자연스레 동맹국으로 쏠리게 되었고, 결국 1914년 10월말. 터키는 정식으로 동맹에 가입한다.
이리하여 독일은 전근대적인 터키군을 현대적인 군대로 개편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터키측의 협조요청에 의해 라이맨 폰 잰더스 장군 휘하 70여명의 군사고문단이 터키로 파병된다. 잰더스 장군은 파견 1년 만에 혼란한 터키군을 정비해 40개 사단 규모의 정규군을 완비시켰고, 중장비들을 각 부대에 고루 배치 하여 터키군이 제역할을 할수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렇듯 터키의 군사력이 증강되고, 러시아전선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가자 연합군 수뇌부는 그동안 관심밖의 지역이었던 터키로 눈을 돌리게 된다.
터키를 만약 점령하거나 최소한 전열에서 이탈시킬수 있다면 연합국측은 자연스레 발칸에서 우위를 점할수 있는 상태였고, 러시아에 대한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외교적인 문제까지 겹쳐서 영국주도하에 터키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가 계획되게 된다.
하지만 이 계획을 주도한 영국군에서 육군과 해군이 따로 작전을 구상하는 어처구니 없는 차질이 생긴데다가 차일피일 그 시행시간이 늦춰지면서 작전구상 자체가 적으로 새어 나가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이런혼란 속에서도 영국군은 7만명의 원정군을 구성하는데 그 편제는 아래와 같다.
- 프랑스 파견군 소속 3개 사단
- 인도 제 29사단
- 안잭군단 (뉴질랜드및 호주병 혼성군단)
1914년 11월 부터 영국해군은 터키 해안에 대한 무력정찰을 수행하면서 해안요새들에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무렵엔 장차 죽음의 진흙투성이 전장이 될 갈리폴리 반도에 겨우 7개 보병대대의 터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소수의 경비정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하지만 영국군이 작전 개시 시간을 차일피일 미루자 터키군은 병력과 요새시설을 증강하여1915년 새해 무렵엔 8만에 가까운 보병병력과 각종 기뢰및 수뢰, 해안요새를 증강시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놓았다. 영국 육군이 수송선단에 실려 다가온 것은 바로 그런 준비가 완비된 무렵이었다.
1915년 2월 19일. 영해군은 단독으로 다르다넬즈 해협 강행돌파 작전을 개시했다. 10여일의 격전끝에 함대는 해협중앙으로 집입했지만, 해협을 가득 메운 기뢰더미와 양안에 배치된 포의 화망에 의해 영국함대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하지만 터키군의 피해도 막심한 상태라 영국함대가 조금만 더 밀어 붙였더라면 터키의 요새들은 모두 백기를 올렸을런지도 모른다. 여하간, 영국해군은 점함격침 3척, 순양함격침4척에 다수의 구축함 격침이라는 참담한 손실을 입고 해협에서 물러나야 했으며3월18일 육군의 투입이 정식으로 결정된다.
원정군 사령관 해밀튼은 이번 갈리폴리 공격이 러시아의 의리(1914년8월, 병력동원 미비에도 불고하고 서진을 감행한것)에 대한 보답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한가한 연설을 하는 가운데 에게해로 접어든 영국육군은 갖가지 곤란함에 직면해야 한다. 제대로된 전술지도조차 없는 현실에다가 터키군에 대한 전면적인 지식부족, 상륙작전에 적합한 전술이나 교리, 장비의 미비등, 도저히 상륙을 시도하는 군대같지 않게 영국군의 준비는 미흡했고, 병사들의 사기만은 의외로 높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영국군은 엉망인 상륙준비를 다시 하느라 한달이라는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했고, 터키군은 그사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영국군을 기다릴수 있었다.
우선, 잰더스 장군이 신편 터키 5군의 사령관이 되어 8만4천의 갈리폴리 반도의 총병력을 지휘하게 되었고, 각종 해안 초소에 대한 정비가 마무리 되었다. 잰더스 장군은 넓은 해안선에 일렬로 병력을 배치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상륙이 용이한 지역에는 연대급, 그렇지 못한 지역에는 최소 소대급의 분견대만 파견하고 주요 거점에 기동성을갖춘 예비대로 편성시켰다. 또, 각 부대별로 각개전투 훈련과 사격훈련을 강화하여 개개인별 전투력 향상에도 주력했다.
이러는 사이 영국군은 준비를 마치고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29사단이반도의 남단인 헬레스에 상륙하고 곧장 직진하여 킬리드바 고원을 점령한다. 그리고 프랑스 사단이 후행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안잭군단이 반도의 허리께인 가바테베에 상륙해 터키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듣기엔 호쾌한 계획이었지만, 터키군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중대한 결점을 해밀튼을 비롯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4월 25일. 드디어 최초의 상륙부대가 헬레스 해안에 상륙을 시도하는데 비교적 쉽게 목표를 제압했고, 킬리도바남방 아키바바 고지를 점령하는 쾌거를 거뒀지만, 각 제대간의 연락이 두절되고 일선 지휘관들이 작전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영국군은 다시 해안선으로 철수하고, 그날중으로 잰더스 장군의 예비대가 전선에 도착해 영국군은해안선의 교두보에 도리어 갇혀 버린다. 서부전선의 참호선들이 이곳갈리폴리 여기저기에 생기기 시작하고, 영국군 선두부대들은 고스란히그 참호속에 갖혀서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다.
당황한 해밀튼의 해군의 지원사격을 요청했지만, 독일 잠수함이 출현함에 따라 해군은 모두 철수해 버렸고, 육군은 고립된 상태로 작전을계속해야만 했다. 남방교두보에서 양군은 병력을 차츰 증강시켜 터키군의 상당수가 헬레스 주변에 포진하게 되었고, 해밀튼은 주공을 북안인 사리베어 능선방면과 수블라만으로 집중시키기로 하고 새로운 작전구상에 들어간다. 해밀튼의 계획은 일견 타당성이있었지만, 스톱퍼드라는 62세의 무능한 장군이 중요한 수블라 방면의 지휘를 맏게 되므로 실패는 뻔히 보이는듯 했다.
8월6일. 영국군의 2차 상륙은 시작된다. 해군함대의 포격뒤에 비틀즈상륙주정에 몸을 실은 영국 제9군은 수블라 만에 상륙을 개시했고,안잭군단은 남방의 참호선 일부를 무너트리고 사리베어 능선을 향게 공격을 시도했다. 안잭군단의 기습은 터키군의 완강한 저지와 증원부대의 투입으로 실패했지만, 9군단의 수블라만 상륙은 성공한다. 이때 수블라만엔 영국군 13개 대대가 상륙을 성공하는데, 터키군은 3개대대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스톱퍼드가 즉시 공격을 개시했더라면영국군은 충분히 터키군을 제압할수 있었을 터인데, 스톱퍼트가 2일이나 공격을 지연시킴으로서 터키군은 병력을 증강시킬 여유를 가질수 있었다.
잰더스 장군은 수블라만에 영국군이 새로운 공세를 펼친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즉시 1개사단의 증파를 명령하는데, 그 증파명령을 받은 사령관이 병사들의 피로를 핑계로 병력이동을 거부한다. 그러자 잰더스 장군은 즉시 그 사단장을 해임시키고 패기 만만한 무스타파 케말(초대 터키 대통령)대령을 사단장으로 임명해 수블라로 달려 가게 하고, 케말 대령은 병사들을 훌륭히 통제해 전장에도착한다.
스톱퍼드가 공격 명령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었을때 터키군은 케말대령의 증원군을 맞이하여 방어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영국군의 공격은 비참한 결과를 빚게 된다. 결국, 영국군은 새로운 전선을 찾아온 갈리폴리 반도에서도 참호속에서 주저앉아 참담한 소모전을 되풀이 하고, 2개월뒤인 12월초부터 차차 철수를 시작하여 1916년1월엔 철수를 완료한다.
영국군은 총40만의 병력을 갈리폴리 방면에 투입해 25만의 대손실을입었고, 터키는 15만의 손실을 입었다. 보다 많은 병력, 우수함 함대, 무기등의 군사상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지휘관들끼리의불화, 지휘계통혼선, 손발이 맞지 않는 상륙전술등등의 이유에 의해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때의 실패를 경험삼에 체계적인 상륙전에대한 연구를 거듭하였고, 훗날 성공적인 대 상륙전의 기틀을 만드는 것이다
출처 : 여기저기 오만데서 퍼온거 짜집기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