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를 움직이는 무슬림 지도자 15人
이원삼 선문대 교수/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1) 테러리스트에서 노벨평화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의 대명사
야세르 아라파트
중동 지역에 관한 국제뉴스를 떠올리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1m65cm도 안되는 자그마한 키, 거친 수염, 하얀 천에 검은 색 체크무늬가 있는 독특한 아랍식 두건에 군복차림, 허리춤의 권총, 마치 시골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인상, 하지만 카리스마적 이미지와 오기 있고 당찬 모습을 보이는 인물,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다.
그는 지난 30여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40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무하마드 압둘 라우프 알 쿠드와 알 후세인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본명보다 야세르 아라파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한때는 서방세계가 지목한 악명높은 아랍 테러리스트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1993년 오슬로평화협상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이스라엘과 힘겨운 중동평화협상을 이끌어내고 있다.
아라파트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1929년 8월24일 이집트 카이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부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팔레스타인학생동맹’을 이끌었다. 1957년에는 서독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대학에서 수학했다. 학업을 마친후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쿠웨이트에 ‘자팔레스타인건설회사’를 세워 무장투쟁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1959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무장조직인 ‘파타’ 결성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무장 게릴라를 인솔하여 70여회에 걸친 테러활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1967년 제3차 중동전에서는 450여명의 ‘파타’ 특공대를 이끌고 전차를 앞세워 공격해온 1만 5,000여명의 이스라엘 군을 격퇴해 파타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내의 최대세력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사건을 주도했고, 여러 차례의 항공기 납치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1968년 PLO 집행위원회 의장이 된 그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암살 위협과 고난을 뚫고 빼앗긴 옛땅을 찾기 위한 마지막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온화한 성품을 가진 그는 ‘팔레스타인혁명과 결혼했다’면서 60여년을 독신으로 지내다 1991년 자신의 비서였던 34세 연하인 ‘수하 알 타윌’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다.
2) 청교도적인 리비아혁명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인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랍민족주의자로 정평나 있다. 그는 1942년 유목 베드윈족으로 사막에서 태어나 자랐다. 젊은 시절 그는 아랍민족주의의 열렬한 주창자였던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혁명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9년 부패와 서구의 대변인으로 전락한 사누시 왕조를 무너뜨리는 무혈 군사 쿠데타를 감행해 오늘날까지 3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리비아를 통치하고 있다. 그는 순수한 이슬람 가치의 복원과 인민에 의한 정치를 부르짖으며 직접민주정치와 녹색혁명을 추진해 갔다. 막대한 석유수입으로 우리나라 대우와 동아건설이 참여한 대수로 공사를 시작하여 사막을 옥토로 바꾸는 그의 녹색혁명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는 국가를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에 바탕을 두고 음주·도박 같은 비이슬람적 행위를 철저하게 근절시켰다. 모든 외국인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하기도 했다. 동시에 피식민지 경험을 공유한 아프리카단결기구 창설과 협력에 남다른 공을 들이면서 반미 국가들을 지원해 서방의 비위를 거스르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서방세계의 반감과 반서구노선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팬암기 폭파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미국에 의한 국제적 압력과 경제제재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제사회가 국제법정에 세우기를 원했던 로커비사건 용의자를 유엔에 인도하면서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완화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리비아의 경제발전과 국제적 위상은 상승기류를 타게 될 전망이며 청교도적인 생활로 두터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카다피의 새로운 역할도 기대된다.
3) 근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자
이븐 사우드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이븐 사우드는 1880년 리야드 근교의 알 다르이야라는 마을에서 사우드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사우드 가문은 당시 북쪽의 라쉬드 가문과 네즈드 지방의 통치권을 놓고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891년 이븐 사우드의 아버지 압둘 라흐만이 라쉬드 가문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가족을 데리고 리야드를 쫓겨났다. 이븐 사우드는 쿠웨이트 알 사바 가문의 도움을 받아 1902년 1월 마침내 리야드를 재탈환하였다. 이 날은 아라비아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날이었다. 리야드의 지배자가 라쉬드 가문에서 사우드 가문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븐 사우드는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력과 설득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각 지역의 부족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이기 위해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1906년 이븐 라쉬드의 죽음을 계기로 이븐 사우드는 다른 적대세력을 굴복시키고 명실공히 아라비아반도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이븐 사우드는 다른 부족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결혼을 자주 하였으며, 그 결과 10명의 부인과 결혼하여 44명의 자식을 두었다.
승세를 몰아 이븐 사우드는 이슬람교의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는 물론 홍해 최대의 항구인 제다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사우디 중부의 헤자즈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샤리프 후세인의 하쉼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헤자즈 지역에서 밀려난 하쉼가는 트랜스 요르단 지역으로 이동해 현재 요르단 하쉬미야 왕국을 건국하게 된다. 이로써 이븐 사우드는 1932년 9월22일 이슬람의 종주국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건국을 공식 선포했다.
그는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아라비아를 통일한 풍운아였다. 그는 내부적으로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중앙집권체제로 통합시키고, 샤리아(이슬람법)를 중시하는 정교일치의 국가제도를 바탕으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1933년 석유개발을 시작함으로써 불모의 땅을 최대 산유국으로 발전시키고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지도자였다. 외부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 서구 식민주의에 대항해 아랍의 대의를 표명하고 아랍민족의 통일을 주창했던 지도자이기도 하다. 1953년 9월9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랍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지도자들이 조의를 표했다. 그는 사막의 땅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수립하고, 20세기 최대의 석유부국이 될 수 있는 기틀과 토대를 마련하고 떠난 것이다.
4) 반미주의의 선봉
사담 후세인
올해는 걸프전이 발발한 지 11년이 되는 해다.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를 무력 응징하기 위해 시작된 걸프전은 미국의 신무기 시험장이 되면서 이라크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전쟁의 패배로 이라크는 유엔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이라크 국민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경제제재로 약 5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사망했다.
하지만 걸프전을 통해 아랍의 영웅으로 등장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어려운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다. 걸프전이 끝난 후 미국은 그를 전복하고자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독재자 후세인에 대한 반감보다 사무친 반미감정의 골이 더 깊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 집권중인 후세인은 1937년 바그다드 북부에 위치한 티그리트라는 한 농촌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개월이 되었을 때 고아가 된 그는 군 장교였던 외삼촌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타르파는 당시 반영·반왕정(反英反王政) 불발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옥살이를 하였다.
후세인은 아홉살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으며, 후일 바그다드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을 때는 학교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후세인은 20세가 되던 1956년 아랍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바스당에 들어가 정치적 인생을 시작했다. 바스당은 범아랍 정당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다. 1968년 바스당이 쿠데타에 성공하자 후세인은 군사평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979년에는 이라크의 최고 실력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85년 이후 아랍세계 밖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인터뷰에는 잘 응하는 편이 아니다. 음악과 시 애호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 가족으로는 부인과 2남3녀와 2명의 사위가 있다. 그의 부인은 두살 연상 외삼촌의 딸인 사지다이다.
5) 중동평화의 중재자
후스니 무바라크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역시 이집트다. 지난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의 직접당사자이자 아랍세계의 맏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동평화회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현 이집트 대통령인 무바라크이다. 가장 확실한 중동문제의 중재자다.
무하마드 후스니 무바라크(Muhammad Hosni Mubarak)는 1928년 5월4일 이집트 나일 삼각주에 있는 카프르 엘 모셀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인의 길로 들어서 1947년 군사학교에 입학하였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67년에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였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에서 그가 지휘했던 공군이 전쟁 초기에 성공적으로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그는 일약 전쟁영웅으로 떠올랐다. 그후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안와르 사다트의 도움으로 정치에 투신한 그는 1975년 4월 사다트 정부의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사다트의 첫 만남은 그가 공군 중위 시절이었으며 이때 사다트는 그를 명석하고 애국심에 가득찬 젊은이로 기억하게 되었고, 이후 제4차 중동전쟁을 통해 두 사람간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되었다. 사다트는 무바라크를 매우 신뢰하였고,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키우게 되었다.
1981년 10월6일, 사다트가 군사퍼레이드중 암살당하자 즉각 무바라크가 후계자로 지명되어 그해 10월13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무바라크는 국가정책에서 사다트의 정책을 유지, 계승하였다. 특히 경제적 개방정책과 이스라엘과의 조약 준수 등은 사다트의 정책과 일치하였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국내 반대파에 대한 정책, 인근 아랍국가들에 대한 정책, 미국에 대한 정책 그리고 부패 등에서 사다트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캠프데이비드협상 이후 소원했던 아랍국가들과의 관계 복원에 힘썼다.
그 결과 아랍연맹의 본부를 튀니지에서 다시 카이로로 이전시킴으로써 아랍세계에서 이집트의 지위를 크게 개선하는 효과를 이끌어냈다. 대미정책에서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친미 일변도 정책에서 탈피하여 비동맹 원칙의 고수와 모든 외국과의 문호개방 정책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걸프전 이후에는 완전히 친미로 돌아서 중동문제에서 미국과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국내외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1993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93년 9월 이스라엘-PLO간 평화협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후 계속된 회담에서도 평화를 위한 열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중동평화의 중재자라는 인식을 전세계인의 마음에 심어 놓았다.
6) 아랍민족주의의 우상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의 대통령이었던 자말 압둘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 이후 분열되어 있던 아랍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통합시킨 가장 위대한 아랍의 혁명지도자다. 그는 약소국가들의 권리와 주장을 담아 비동맹을 결성하였고, 비동맹이 세계정치 무대의 한 축이 되게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지금도 아랍세계에서 아랍민족의 영웅, 아랍 통합의 기수,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 이긴 아랍의 영원한 자랑으로 여겨진다. 현재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 리비아의 카다피 국가 원수,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 등은 그를 혁명 지도자로 추종하고 있다.
나세르는 1918년 1월15일 이집트 아시우트주의 베니 모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8년 카이로의 왕립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8∼49년의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여 부상당한 채 조국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패배당하는 굴욕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1952년 7월 23일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자유장교단을 기반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나세르는 과감한 정치개혁을 통해 사회적 차별 철폐, 왕정 폐지, 토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봉건제를 타파하고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정으로 새 시대를 열어 갔다.
나세르의 대내외 정책 기조는 나세르주의(Nasserism)로 표현되는 아랍사회주의와 아랍민족주의다. 나세르주의는 다음 3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이집트중심주의시기(1952∼55)로, 국내 정치권력을 확보하고 혁명정권이 창출하고자 하는 미래 국가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둘째, 범아랍주의 시기(1955∼61)로 정당 해체, 무슬림형제단 불법화, 토지개혁 등을 통해 전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셋째, 아랍사회주의시기(1962∼64)로 나세르는 영국 주도의 바그다드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동맹국회의였던 반둥회의에서 적극적 중립주의를 표방하였다. 나아가 제2차 중동전쟁을 촉발시킨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1958년 2월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합병하여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이 탄생했다.
그러나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에서 탈퇴하자 나세르는 범아랍주의보다 아랍사회주의를 통해 아랍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의 패배로 나세르주의도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결국 1970년 9월 그는 과로로 인한 심장병으로 갑자기 서거하였다.
현대 이집트·중동 및 아랍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나세르에 대한 평가는 근대화의 주역, 아랍민족 통합의 기수 등 매우 긍정적인 측면에서부터 개발독재, 카리스마적 리더십, 관료적 권위주의, 권위주의적 대중주의 등 부정적 측면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설명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나세르는 현대 중동국가들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 지도자의 모델적인 인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아랍국가 민중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7)이란 이슬람혁명의 큰 별
아야톨라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아래로부터의 민중혁명으로 20세기 이슬람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걸출한 인물이다. 지금도 그의 사상은 이란은 물론 이슬람권 전체에서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호메이니의 본명은 사이드 루홀라 알무사비 알호메이니이다. 그는 집안 대대로 쉬아파 지도자인 몰라의 가문에서 1900년경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5개월만에 그의 아버지는 지방 영주의 명령으로 살해되었으며, 그때부터 어린 호메이니는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마저 죽자 숙모가 그를 양육했고, 15세 되던 해부터 이미 장성한 형이 호메이니를 맡아 키웠다.
그는 고향 호메인의 이슬람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아락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이슬람법을 수학했다. 1922년 스승이 시아 이슬람의 성지인 콤으로 이주하자 호메이니도 스승을 따라 콤으로 이주해 학문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고위 시아 종교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아야톨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30년경부터 자신의 출신 지명을 나타내는 ‘호메이니’라는 이름을 사용해 ‘아야톨라 호메이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시의 수많은 이란인들처럼 호메이니도 이란에 대한 외세의 개입에 분노하고 있었다. 특히 서구 열강들은 이슬람의 전통을 파괴시켜 가며 현대정치를 추구하던 당시 이란의 정치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1941년 레자 샤의 아들 무하마드가 서구의 지원으로 왕이 되어‘백색혁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호메이니는 국왕의 세속정치와 독재에 강력히 항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호메이니는 국왕의 명령으로 1963년 투옥되었다. 그의 투옥은 반정부 폭동에 불을 붙였고 이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이란 국왕은 1964년 11월 호메이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를 거쳐 파리에서 도피와 망명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직적인 반정부투쟁을 주도해 갔다. 1970년대부터 이란의 반정부운동은 극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호메이니는 파리에서 자신의 육성을 담은 테이프를 이란에 보내 이란 국민들에게 혁명의 불길을 댕겼다. 결국 1979년 2월 이란 국왕이 해외로 도피하고 호메이니는 이란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이란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그해 12월 호메이니는 이슬람법을 기초로 한 새 헌법을 공표하고 국호도 이란이슬람공화국으로 바꾸었다. 호메이니는 초헌법적 지도자인 ‘파끼흐’가 되어 명실공히 신정일치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89년 6월 호메이니는 세상을 떠났으며 온 국민은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그의 서거를 애도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비록 8년간의 전쟁과 서구의 경제제재 조치로 이란 경제는 어려웠지만, 이슬람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 형태를 이란 국민들에게 남겨 주었다.
8) 문명대화 주창 21세기 이란의 리더
모하마드 하타미
1997년 5월23일은 변화를 갈망하던 이란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개혁의 선봉인 모하마드 하타미가 보수파의 상징인 국회의장 나테크 누리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개혁파 하타미의 등장으로 이란은 이슬람혁명 이후 20여년만에 새로운 희망과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는 1942년 이란 중부의 야즈드 지방에 위치한 아르다칸(Ardakan) 마을에서 중산층 성직자 가문에서 출생했다. 하타미는 비교적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인 루홀라 하타미(Ruhollah Khatami)는 최고 성직자로서 그의 신실함과 진보적인 견해로 이란 전역에서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던 종교지도자였다.
하타미를 성직자로 키우고자 했던 부친의 뜻에 따라 하타미는 아홉살때 고향인 아르다칸을 떠나 1961년 성도 콤으로 가서 1965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마드라사에서 종교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1965년 콤을 떠나 당시 최고의 대학이던 이스파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69년부터는 테헤란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2년후 다시 콤으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 법·법률학·철학 공부에 매진했다. 하타미의 부인은 유명한 이슬람법학 교수의 딸인 조흐레 사데기(Zohreh Sadeghi)다. 매우 명료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 왕 샤의 박해를 피해 독일에 유학한 하타미는 그곳에서 이란외국유학생회를 조직하고 샤를 타도하기 위한 선전·출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혁명 직전인 1978년에는 함부르크이슬람센터의 책임자로서 이슬람혁명의 최선봉에 섰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성공으로 귀국한 그는 1980년 아르다칸과 메이보드 지방 대표로 국회에 진출했고, 1981년에는 호메이니에 의해 카이한신문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부 장관으로 봉직하면서 그는 영화·음악·문학 등에 대한 획기적인 규제완화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또한 1980∼88년 이란-이라크전쟁 기간에는 전쟁정보본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2년 국회의 압력으로 사임한 이후에도 그는 라프 산자니 대통령의 문화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그후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이란 국립중앙도서관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이란은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툴라 하메이니와 대통령인 하타미의 2원체제로 통치되고 있다. 그러나 군통수권과 사법부, 안보와 정보 분야 등 실제적인 권한은 최고통치자에게 있다. 이런 면에서 하메이니와 하타미의 정책적 협력이 이란 정치의 성공에 매우 긴요하다. 서방의 비관적 전망과 달리 이란 국민들은 두 사람간의 신뢰와 협력에 긍정적인 기대를 하고 있다.
하타미 대통령은 독일어·영어·아랍어에 능통하고 세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1999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된 ‘희망과 도전’(Hope and Challange)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이 잘 요약되어 있다.
특히, 문명간 대화를 주창해 유엔이 올해를 ‘문명간 대화의 해’로 결정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9)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오스만 왕정을 무너뜨리고 터키공화국을 이룩한 아타튀르크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국부라는 뜻이다. 그가 처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제1차 세계대전때 여러 전투에서 오스만 왕정의 장교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부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동맹국들의 패배로 끝나자 승전국인 연합국들은 패전국인 오스만터키제국을 분할점령하게 되는데, 무스타파 케말은 점령지를 되찾기 위한 영토회복투쟁을 주도하였다. 1919∼22년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아나톨리아반도 전역에서 연합국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러한 활약으로 터키인들의 국민적 영웅이 된 그는 1923년 오스만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1938년 사망할 때까지 터키의 개혁에 힘썼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주의 공화국을 이룬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이 주창한 6개의 기본 원칙, 즉 공화주의·민족주의·국민주의·국가주의·세속주의·개혁주의를 국가 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표방한 터키공화국은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그 골격을 유지하면서 민주적이고 발전된 서아시아 국가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개혁 외에도 1928년 아랍문자를 버리고 라틴문자를 채택하는 놀라운 문자개혁을 단행했다. 문자개혁은 전통과 역사의 단절이라는 역효과에도 불구하고 문맹을 줄여 터키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스타파는 1881년, 당시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던 마케도니아주의 한 도시인 셀라니크(오늘날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1923년 1월29일 라티페 하늠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자식도 없었으며 열화와 같은 주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재혼하지 않았다. 어려운 소년기를 보낸 그는 1893년 군사중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매우 성실한 학생이었다. 특히 수학을 매우 잘해 수학 선생은 케말(완전무결)이라는 이름을 무스타파에게 새로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 되었다.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9년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생도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했으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1905년 참모대학을 졸업하면서 대위로 진급한 그는 당시 오스만제국 군인으로서 시리아·이집트·발칸 지역 및 중동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군사적 경험과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1915년 3월 다르다넬스해협의 차나칼레 전투에서 연합군 함대의 해협 통과를 저지하고, 뒤이어 겔리볼루반도로 상륙작전을 감행한 연합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결과 연합군이 후퇴하자 그는 이스탄불의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고 국민적 영웅이 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뒤 1916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파샤(장군)가 되었다. 이때부터 연합군을 터키에서 몰아내는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빼앗긴 터키 영토 대부분을 다시 찾게 되었다. 현재 그는 터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들에게는 터키의 서구화와 세속화를 부추긴 인물로 비판받기도 한다.
10) 동남아 이슬람권의 기수
빈 모하마드 마하티르
1925년생인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1999년 11월29일 앞당겨 치러진 총선에서 다섯번째 권력 재창출에 성공했다. 2004년까지 통치할 경우 23년간의 장기집권이 된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마하티르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고금리와 재정긴축 방안과 정반대로 환율을 고정시키고 외화유출입을 통제했다. 정부 지출을 늘려 공공사업을 계속하고, 은행 구조조정을 실시하면서도 퇴출시키지 않았다. 나아가 국내정치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안와르 아브라힘 부총리를 부패와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시키자 반정부투쟁은 한층 드세졌다. 안와르는 혐의가 인정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수감중이다.
산부인과 의사 출신의 소장정치인이었던 마하티르가 전국적 인물로 부각된 것은 정면승부로 이루어진 것이다. 1969년 말레이계와 중국계 간의 싸움이 인종폭동으로 비화되자 당시 의원 경력 5년의 마하티르는 당 지도부에 총리 사임을 요구했다. 그의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져 현재의 다인종 화합정책의 모태가 됐다.
그는 인구의 55%를 차지하는 말레이인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시행하면서도 소수계인 중국인들의 언어·교육·공직사회 진출에 대한 배려도 하고 있다. 마하티르는 가혹한 인권탄압을 하지 않으면서 경제개발에 큰 성공을 거두어 ‘말레이시아 경제의 아버지’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마하티르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시아적 가치’와 서방과 구별되는 독자노선을 강조했다. 그는 2020년 말레이시아를 선진국 대열에 들게 하겠다는‘비전 2020’을 1991년부터 추진해 오고 있다.
76세가 된 마하티르 총리가 금융위기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위대한 조국 말레이시아의 영광스러운 21세기’를 열 수 있을지 여부는 국가경제의 회생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과제에 성공하면 마하티르는 제3세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11) 20세기 아랍문학의 최고봉
나지브 마푸즈
1988년 아랍세계에도 드디어 노벨문학상이라는 영광이 찾아왔다. 이로써 중세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아랍문학은 이집트의 독보적인 작가이자 이집트 문학을 대표하는‘나지브 마푸즈’에 의해 그 영광을 확인받았다. 나지브 마푸즈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알자말리야 지역에서 3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기에 들어서며 탐정소설에 탐닉하였고, 여가수 ‘움무 칼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고 전한다.
1930년 그는 카이로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유럽 철학자들의 방법론을 접하고 다윈·헤겔·아우구스트의 글들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전통적 이슬람의 신념과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들은 후에 그의 문학작품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1934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슬람 철학에서 미의 개념’이라는 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학 경험이나 체계적으로 문학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다. 청소년기에 탐정소설과 영화감상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인 것과 대학 시절 미학 분야에서 안목을 길러 놓은 것이 그의 지적 재산의 전부였다.
마푸즈의 초기 작품활동은 1938년 ‘광기의 속삭임’으로 시작된다. 28편의 단편을 담은 이 모음집에서 마푸즈는 억압받는 민중의 삶을 묘사하며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주의 소설을 발표하며 명성을 얻게 된 제2기(1945∼58)에 그는 ‘새로운 카이로’를 위시하여 ‘알 칸 알 칼릴리’ ‘3부작’ 등을 발표한다. 당시 극도로 불안하던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사회 분위기를 중심으로 이집트인의 고뇌에 찬 삶을 예술적으로 형상화시켰으며 비판적, 분석적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제3기(1959∼71)에 발표한 첫 소설인 ‘우리 동네 아이들’(1959)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 인간, 인생의 의미나 실현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문제를 다룬 상징적 철학소설이라 할 만하다.
제4기(1972∼현재)의 ‘선술집 검은 고양이’ ‘버스 정류장에서’는 악몽 같은 세상이 묘사되고 있고, 폭력행위가 작품에 난무하며, 추상적인 우화 형식이나 부조리문학이 주류를 이룬다.
마푸즈는 작가로서의 활동 외에 예술위원회와 영화위원을 맡았고 알 아흐람 신문의 편집위원을 지내면서 집필작업에 몰두하나, 눈병으로 매년 10월부터 4월까지만 작업하고 여름에는 주로 구상만 했다. 그는 이집트와 유럽 등지에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다 드디어 1988년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집트 대통령으로부터 나일훈장을 수여받았다.
12) 페르시아의 영상마술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이란의 명감독이다. 혁명과 테러가 연상되는 이란에서 서구인의 상상을 깨고 놀라운 영화장르를 만들어낸 영상의 마술사다. 그것도 판에 박힌 물질주의적 서구식 영화가 아닌 동양적 사고와 명상을 배경으로 하는 이란식 영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1940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18세에 미술공모전에서 수상했고, 테헤란대학교 회화과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했다. 졸업후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고분야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가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제작한 광고 필름만 150편이 넘는다. 이처럼 키아로스타미는 광고 필름 타이틀 제작이라는 직업적 경험과 영화감상이라는 개인적 취미를 통해 미래의 영화 거장으로서의 자질을 축적해 나갔다. 그가 본격적으로 영상예술에 전념하게 된 것은 1969년이다. 청소년지능개발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그의 첫 작품은 서정적 단편인 ‘빵과 골목’(1970)이다. 한 소년이 하교길에 친구들로부터 방해받자 갖고 있던 빵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통과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 속에서 이미 앞으로 키아로스타미가 추구할 영상예술의 특성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즉, 즉흥 연기,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적절한 조화, 대화보다 침묵을 통한 호소가 담겨 있으며, 한편의 서정시나 담백한 수채화처럼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작품 소재의 대부분이 어린이들의 학교와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빵과 골목’을 제작한 이후 약 30년 동안 키아로스타미는 아동용 단편영화, 픽션 장편영화, 다큐멘터리 장편영화, TV 연속극 등 20여편의 영화를 제작했다.그러나 그가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작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을 수상했다. 미학적인 화면구도, 간결한 대화가 휴머니즘을 조용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함께 키아로스타미를 대변하는 대표작이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서구 비평가들은 ‘지구를 울린 3부작’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 자신이 가장 아끼던 작품은 ‘클로스업’(1990)이다. 이 작품은 가난한 실직자이자 영화광이었던 알리 사브지안이 이란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던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행세를 하다 고소당했던 실제의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자살을 주제로 다룬 ‘체리 향기’(1997)에서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결국 199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의 영화는 이란의 실제 풍경 속에서 이란 사람들이 늘어놓는 삶의 체험을 절묘한 리듬으로 재배치해 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영화와 서구영화의 스타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영화가 대부분 실화에 기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끝이 없는 시작의 순환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는 죽어 가는 영화, 점점 기계화되는 영화에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13) 근대 이슬람국가 최초 여성 총리
베나지르 부토
베나지르 부토는 1979년 사형당한 전 파키스탄 대통령 부토의 2남2녀 중 장녀로 카라치에서 태어났다. 부토는 일찍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1969년 미국으로 유학간 부토는 명문 레드클리프대에서 수학했으며, 1973년 우등으로 하버드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후 옥스퍼드대에서 3년 동안 정치학·철학·경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977년 6월 영국에서 돌아온 부토는 외교관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일으킨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아버지의 정권을 전복시키고 그를 감금해 버렸다.
부토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 대신 그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고 이후 수년간 가택연금이나 수감생활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아에 대항했던 부토는 아버지에게 가장 믿을 만한 동지였다. 당시 지아 울 하크 군부정권이 이끄는 정치 및 종교연합 세력은 부토에 대항해 쓸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는 이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인 샤리아에 기초한 이슬람법, 즉 정부 및 사회의 모든 측면들은 이슬람의 교리에 따르도록 할 것을 파키스탄의 최고법으로 제정했다.
그러나 1988년 부토는 지지자들과 함께 선거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선거 결과는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근본주의의 아성이 되고 말 것이라는 당초의 기대와 달리 승리의 기쁨은 부토에게 돌아갔다. 군도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이리하여 그는 근대 이슬람국가에서 첫번째 여성총리가 되었다. 또한 파키스탄의 민주정부에서 35세의 나이로 가장 젊은 지도자가 되었다.
이슬람교 신학자들은 부토를 총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이 이슬람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기존의 주장을 고집했다. 따라서 그는 제한된 권한만으로 조심스럽게 임무를 수행했다. 1993년 그는 두번째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특권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전국민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부토의 가장 큰 실수는 남편 아지브 알리 자르달리를 잘 관리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나왑샤 지방의 조그만 지주 집안 출신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의 이권개입과 권력남용은 부토의 실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완전한 민주화가 오기 전에 부토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사실 전통적인 이슬람국가에서 여성이 최고지도자로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부토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음에 틀림없다. 특히 그가 여성정책 분야에서 이룬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14)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의 첫 여성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1999년 10월20일 대통령선거에서 메가와티 여사는 와히드 대통령 체제의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국민으로부터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맏딸이다. 그가 오늘의 위치에 오른 것도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는 바 크다.
1947년 1월23일 수카르노와 그의 두번째 부인 파트마와티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을 옮겨가며 심리학과 농업을 전공했다. 그러나 대학 재학때 민족학생운동에 가담해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세번 결혼해 자식을 셋 두었다. 현 남편인 타우픽 키에마스는 국회의원을 지낸 기업가다.
1983년 친기독교 정당인의 자카르타지부장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한 메가와티는 1993년 당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는 당내 반대파에 의해 1996년 민주당 총재직을 박탈당한 그는 1998년 10월 투쟁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99년 6월 총선에서 집권 골카르당을 누르고 제1당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민주화의 상징으로 급부상해 야당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특히 빈곤층과 학생들로부터 인도네시아 개혁운동의 기수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은 혈육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대통령에 당선된 메가와티는 우선 아체·아리안 자야에서 독립을 원하는 분리주의운동을 잠재우고 말루꾸제도 사태 등 2년 동안 4,000명의 희생자를 낸 종교분쟁을 해결해야 한다. 그보다 당면과제는 부패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인 수하르토 전 대통령 처리 문제다.
메가와티는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유능한 보좌진을 거느리고 있다. 또 그에게는 폭 넓은 국민의 지지가 있다. 지난해 당선을 확신했던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후 그는 지금까지 주로 행사에 참가하는 역할을 전담해 왔다. 그러나 메가와티의 권한이 확대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합의정치로 복귀하고 있는 중이며, 폭력과 갈등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15)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
베쿰 칼레다 지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남성중심의 이슬람국가에 여성 총리가 등장했다. 칼레다 지아다. 지아는 1945년 8월15일 태어났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지아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앙 속에서 성장했다. 중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열다섯살의 나이에 부모님이 정해 준 군장교와 결혼했다. 그가 전 방글라데시 대통령인 지아 울 라만이다.
지아 울 라만은 1978년 6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 부인으로서 지아는 정치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공식석상에조차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1982년 5월 남편인 지아 울라만 대통령의 암살은 지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방글라데시 국민당은 남편에 이어 지아를 당수로 영입하고 본격적인 정권투쟁에 나섰다.
1987년 지아는 중도파 7개 야당을 연합해 본격적인 반정부투쟁에 나섰다. 지아는 여러번 구속, 가택연금, 출국금지 등을 당하면서도 에르샤드 대통령 퇴진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했고, 부정부패와 독재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저항을 이끌어냈다.
1991년 2월27일 방글라데시에서는 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지아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가 이끄는 방글라데시국민당이 총의석 300석 중 122석을 확보해 정적인 하시나를 누르고 승리했다. 1991년 3월19일 지아는 총리로 지명되었다. 방글라데시는 최초로 민주적 방법으로 지도자를 탄생시켰다.
지아의 승리는 이슬람권에서 파키스탄의 부토에 이어 두번째 여성 총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91년부터 1996년 3월까지 재임하는 동안 지아는 20년이 넘는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뿌리박힌 대통령제를 다시 의회민주주의로 되돌려 놓았다. 또한 납세율을 높임으로써 늘어난 예산을 국가의 핵심산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했다. 그의 재임 기간 방글라데시는 처음으로 농업·산업부분에서 성장했다.
1996년 걸프 전후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오랜 정적인 하시나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총리로서의 지아는 방글라데시에 진정한 민주주의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방글라데시 최초로 민주적 방법을 통한 그의 총리 취임은 이슬람권에서 여성 정치가의 정치적 역량과 가능성을 보여준 하나의 이정표였다.